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무라 카츠야 (문단 편집) == 은퇴 후 ==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다가 1989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감독에 임명되면서 그 유명한 데이터 야구를 구사하면서 [[후루타 아츠야]] 같은 명포수를 발굴해내며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 3번(1993,1995,1997년)과 센트럴리그 우승 4번을(1992,[* 일본시리즈에서 3승 4패로 아쉽게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1년후 다시 만나 똑같이 4승 3패로 그 수모를 갚았다.]1993,1995,1997년) 기록하는 등 최전성기를 누렸다. 이로 인해 야쿠르트 팬들이 노무라 감독을 선호할 정도. 이후 1999년 [[롯데 자이언츠]]의 [[8888577]]와 맞먹는 [[4466566664|암흑기]]를 지내던 [[한신 타이거스]]의 감독이 되나 결과는 처참했다. 3년 연속 꼴찌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고 게다가 아내 사치요가 탈세 혐의로 구속[[크리]]까지 겹치면서 노무라 감독에 있어서는 최악의 '''[[흑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때 한신이 말그대로 개막장 시기였고, 이후 한신의 강팀 도약에 있어 노무라 한신의 선수육성이나 운영이 밑바탕이 되었다는 재평가도 존재하여 최근 들어서는 한신 감독 시절의 평가도 크게 나쁘지는 않은 편. 사실 원래부터 강팀을 맡았던 적이 드물기에 감독으로서 승률은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난카이 시절을 제외하면[* 노무라가 떠난 후 호크스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거치며 1998년 리그 A클래스(1~3위권)에 오르기 전까지 '''단 한번도 리그 우승은 커녕 A클래스에도 오르지 못하며 무려 20년간(1978~1997년) 리그 하위권인 B클래스(4~6위권)에만 머물렀다.''' 일명 [[노무라의 저주]]라 불리는 호크스의 암흑기.] 야쿠르트, 한신, 라쿠텐 등 약체팀의 토대를 만드는 능력은 가히 최고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2003년 일본의 사회인야구단 시덕스의 감독 겸 [[GM]]으로 부임해 2005년까지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2003년엔 팀을 사회인 야구리그 준우승으로 이끌며 그가 괜히 명감독으로 불리는 게 아니란 걸 증명했다. ~~결론 : 한신은 그냥 개노답 '''병'''신이었던 거다.~~ 2006년 7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으로 취임.[* 이것으로 2005년 시즌 종료 후 폐암으로 사망한 [[오기 아키라]]가 [[오릭스 버팔로즈]] 초대 감독으로써 기록한 '''최고령 감독 기록''' 을 갱신했다.] 그 후, 2008년 7월 15일 '''세계 최초 선수-감독 30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으며, 2009년 팀을 창단 후 첫 A클래스와 포스트시즌에 올려 놓았지만 시즌 종료 뒤 ~~그 라쿠텐 병신 프런트에게~~ 해임되었다. 감독 통산 성적은 1565승 1563패 1무로 1500승과 1500패를 모두 넘겼다. 자세한 내용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 항목을 참조할 것. 이후 [[산케이 신문]]의 전속 평론가로 일하고 있었으며, TBS에서 해설로도 활약하고 있으나 현대야구와 맞지 않는 지론 때문에 심각하게 까이는 편이었다. 2018년 소프트뱅크-요미우리 OB전에서는 무려 난카이 유니폼을 다시 입고 나왔다(!!!). [[http://www.hochi.co.jp/baseball/npb/20180211-OHT1T50003.html|기사]] 노무라는 난카이 감독에서 물러난 뒤 호크스가 난카이-다이에-소프트뱅크로 소유자가 변화하는 동안 교류를 하지 않았다가 호크스 75주년, 80주년 행사에 난카이 시절의 유니폼을 입을수 있게 되고서야 참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